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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코인이 “돈을 보낸다”를 발명했다면, 이더리움은 거기에 동사 하나를 추가했다. “조건이 맞으면 실행한다.”

이 한 문장이 가상화폐를 ‘디지털 화폐’에서 ‘프로그래밍 가능한 금융’으로 바꿨다. 앞으로 다룰 DeFi(⑪), NFT(⑫), 스테이블코인(⑩)이 전부 이 한 문장 위에 서 있다 — 그래서 이번 편이 시리즈 후반부 전체의 받침대가 된다.

자판기 — 중개인 없는 계약의 원형

스마트 컨트랙트의 직관은 거창한 기술이 아니라 자판기다.

자판기는 계약을 실행하는 기계다. “1,500원을 넣고 3번을 누르면 콜라를 준다”는 약속이 기계 안에 박혀 있고 — 점원도, 계약서도, 법원도 없이 그 약속이 자동으로, 차별 없이, 매번 이행된다. 자판기는 단골이라고 서비스를 주지 않고, 사장 기분에 따라 가격을 바꾸지 않는다.

스마트 컨트랙트는 블록체인 위에 올린 자판기다. 조건과 실행을 코드로 적어 장부(②편)에 올려 두면, 조건이 충족될 때 누구의 허락도 없이 실행된다. 올린 뒤에는 만든 사람조차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

“A가 돈을 보내면, B에게 토큰을 보낸다” — 환전 자판기 (⑨편의 DEX) “담보가 기준 아래로 떨어지면, 자동으로 처분한다” — 전당포 자판기 (⑪편의 렌딩) “이 토큰의 주인을 장부에 기록한다” — 등기소 자판기 (⑫편의 NFT)

계약의 이행을 사람의 양심이 아니라 기계의 구조에 맡긴다 — ③편에서 합의가 했던 일을, 스마트 컨트랙트는 계약에서 한다.

스마트 컨트랙트의 자판기 모델 — 조건 충족이 실행을 부른다

이더리움 — 자판기를 올릴 수 있는 세계 컴퓨터

비트코인의 장부는 의도적으로 단순하다 — 보내고, 받고, 끝. 이더리움은 장부 위에 프로그램을 올리고 실행할 수 있는 환경(EVM, 이더리움 가상머신) 을 만들었다. 전 세계 수만 개 노드가 같은 프로그램을 같은 순서로 실행하고 결과를 합의한다 — 그래서 ‘월드 컴퓨터’라는 별명이 붙었다.

성능만 보면 우스운 컴퓨터다. 스마트폰 한 대보다 느리다. 하지만 이 컴퓨터의 상품은 속도가 아니라 — 멈추지 않고, 결과를 조작할 수 없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성질이다. 빠른 컴퓨터는 많지만 그런 컴퓨터는 이것뿐이다.

EVM이 사실상의 표준이 되면서, 다른 체인들도 EVM 호환을 내걸고 개발자 생태계를 흡수하려 한다. 개발 도구·인력·코드가 쌓인 곳에 다음 서비스도 쌓이는 — 플랫폼 네트워크 효과가 여기서도 작동한다.

가스비 — 연산의 가격표이자 스팸 방어막

월드 컴퓨터의 자원은 유한하다. 그래서 모든 실행에는 가스(gas) 라는 수수료가 붙는다. 단순 송금은 가스를 적게, 복잡한 컨트랙트 실행은 많이 쓴다 — 연산량에 비례하는 종량제다.

가스의 역할은 두 겹이다.

  1. 자원 배분 — 블록 공간은 한정돼 있고, 수요가 몰리면 가스 가격이 경매처럼 오른다. 네트워크가 붐빌 때 수수료가 치솟는 이유다.
  2. 스팸 방어 — 실행마다 비용이 들기에, 무한 반복 코드로 네트워크를 마비시키는 공격이 경제적으로 불가능해진다.

실무 감각도 여기서 나온다. 가스비는 거래 금액이 아니라 연산 복잡도에 비례한다 — 1억 원을 보내든 1만 원을 보내든 단순 송금 가스비는 같다. 그래서 소액일수록 수수료율이 가혹해지고, 이것이 ④편 L2가 풀려는 문제였다.

가스비의 구조 — 블록 공간을 둘러싼 경매

토큰 표준 — 생태계를 만든 규격의 힘

스마트 컨트랙트의 가장 큰 응용은 토큰 발행이다. 그런데 저마다 제멋대로 만들면 지갑·거래소가 토큰마다 따로 대응해야 한다. 그래서 표준 규격이 생겼다.

  • ERC-20 — 대체 가능 토큰의 표준. 모든 단위가 동일한 ‘동전’형 (스테이블코인, 거버넌스 토큰 등 대부분)
  • ERC-721 — 대체 불가 토큰(NFT)의 표준. 하나하나가 고유한 ‘등기권리증’형 (⑫편)

표준의 위력은 콘센트 규격과 같다. 220V 규격 하나 덕분에 어떤 가전이든 어느 집에서나 꽂힌다 — ERC-20 규격 덕분에 새 토큰이 나오는 즉시 기존 지갑·거래소·DEX에 그대로 꽂힌다. 이더리움 생태계가 커진 비결의 절반은 기술이 아니라 이 규격의 선점이었다고 나는 본다.

코드가 법이다 — 빛과 그림자

마지막으로 정직한 경고. “Code is law(코드가 곧 법)“는 이 세계의 자부심이자 아킬레스건이다.

빛은 명확하다 — 사람의 재량이 사라진 자리에 예측 가능성이 들어선다. 그림자도 명확하다. 버그도 법이 된다. 코드에 허점이 있으면 그 허점을 이용한 자금 탈취조차 ‘코드대로 실행된 것’이다. 실제로 역사상 큰 해킹 사건의 다수가 장부(②편)가 아니라 컨트랙트의 버그에서 났다.

그래서 이 동네에는 감사(audit) 라는 안전장치가 있다 — 전문 업체가 코드의 허점을 검수하는 절차다. ⑭편의 체크리스트에서 “감사 받았는가”가 한 관문이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1. 스마트 컨트랙트는 정말 한 번 배포하면 못 고치나?

A. 원칙적으로 불변이지만, 실무에서는 업그레이드 가능한 구조(프록시 패턴)로 배포하는 경우가 많다. 편리한 대신 — 운영자가 로직을 바꿀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해서, ‘누가 업그레이드 권한을 쥐고 있는가’가 그 프로젝트의 실질적 탈중앙화 수준을 보여 준다.

Q2. 현실의 계약도 대체할 수 있나?

A. 조건이 온체인 데이터로 판정 가능한 영역(송금·교환·담보 처분)에서는 강력하지만, “성실하게 근무한다” 같은 주관적 조건은 코드로 판정할 수 없다. 현실 정보(가격 등)를 체인 안으로 가져오는 오라클이라는 다리가 있는데, 이것이 조작되는 사고도 있었다 — ⑪편에서 다룬다.

Q3. 이더리움 말고도 스마트 컨트랙트 체인이 많던데 뭐가 다른가?

A. 기능은 대동소이하고, 차이는 ④편의 트릴레마 좌표(속도·비용·탈중앙화)와 생태계 두께(개발자·자금·도구)다. 후발 체인의 성능 우위가 이더리움의 생태계 중력을 이길 수 있는가 — 이것이 ‘L1 경쟁’ 서사의 본질이다.

Q4. 가스비가 아까운데 줄이는 방법은?

A. 세 가지다. 혼잡 시간대를 피한다(가스 추적 사이트에서 확인), L2를 쓴다(수십 분의 일), 그리고 불필요한 컨트랙트 상호작용 자체를 줄인다. 특히 소액 거래라면 L1 직접 사용은 수수료율이 가혹하니 L2가 합리적 기본값이다.

시리즈

가상화폐의 작동원리

  1. 가상화폐의 작동원리 로드맵 — 입문 용어부터 MEV까지 (전 14편 가이드)
  2. 가상화폐의 작동원리 ① — 가상화폐라는 자산, 도박이라는 오해에 답하다
  3. 가상화폐의 작동원리 ② — 블록체인, 위조할 수 없는 장부의 구조
  4. 가상화폐의 작동원리 ③ — 합의의 작동원리, PoW와 PoS 그리고 파이널리티
  5. 가상화폐의 작동원리 ④ — 트릴레마와 레이어, 모든 체인이 치르는 삼각 거래
  6. 가상화폐의 작동원리 ⑤ — 스마트 컨트랙트, 약속을 실행하는 기계
  7. 가상화폐의 작동원리 ⑥ — 영지식 기술, 보여주지 않고 증명하는 수학
  8. 가상화폐의 작동원리 ⑦ — 지갑의 작동원리, 코인이 아니라 열쇠를 보관한다
  9. 가상화폐의 작동원리 ⑧ — 거래소 실무, 원화로 코인을 사기까지의 모든 구조
  10. 가상화폐의 작동원리 ⑨ — 스왑과 브릿지, 온체인 환전소와 체인 사이의 다리
  11. 가상화폐의 작동원리 ⑩ — 스테이블코인과 RWA, 변동성 없는 코인의 구조
  12. 가상화폐의 작동원리 ⑪ — DeFi, 은행 없는 은행의 구조와 이자의 출처
  13. 가상화폐의 작동원리 ⑫ — NFT, 그림 파일이 아니라 등기권리증이다
  14. 가상화폐의 작동원리 ⑬ — MEV, 거래 순서에 숨은 보이지 않는 세금
  15. 가상화폐의 작동원리 ⑭ — 생태계 지도와 투자 체크리스트, 사기를 거르는 다섯 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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